Stunning flow

Great melt 上

2017. 7. 27. 02:42






















  나는 한 번도 길을 해매지 않고 목적지까지 제대로 찾아간 적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지독한 길치였다. 그날도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도중 아,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때였다. 신호는 몇 십 분이 지나도록 파란불로 바뀔 생각을 안했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일기예보는 분명 비는커녕 종일 뜨거운 햇빛이 작렬할 것이라 했는데 말이다. 집에서 늦지 않게 출발했고, 지하철도 맞게 탔고, 출구도 제대로 잘 나왔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만나기로 했던 한상혁은 몇 시간 째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옷은 이미 다 젖었고 다리가 아팠고 배가 고팠다. 한마디로 나는 지금 정말 빡이 쳤다, 이 말이다. 결국 더 이상 길을 찾을 의지를 잃어버린 채 비를 적당히 피할 수 있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내가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계속 의미 없는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내가 계속 안 오면 한상혁이 알아서 전화 하겠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그제야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순간의 당황함과 빨리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좀 빨리 전화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나마 비를 조금 막아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곧 그리 멀지 않은 도로변에 컨버터블 한 대가 탑이 열린 채 세워진 것을 발견했다. …비 오는 날에 탑이 열린 오픈카라니. 오늘의 날씨를 미리 예상 못하고 지금쯤 온갖 당황함과 황당함으로 물들었을, 나 같은 사람들이 저기 또 있었네. 운전석에는 남자가, 조수석에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나이는 대충 20대 중반쯤. 커플인건가.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에서도 둘의 모습은 잘 보였지만 대화의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바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 저들은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은 아니라는 것 쯤 은 아주 잘 알겠다.


  대화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여자의 쏟아내는 그 많은 말들은 마치 오랜 시간 고여 있던 마음을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어떤 고함 같았다. 그것은 한참을 홀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자는 말없이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곧 여자가 조수석의 문을 거칠게 열고 내렸고 다시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여자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차를 등지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리고 운전석의 남자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잡지 않았다.


  어째서 였을까. 운전석에 혼자 남겨진 남자의 얼굴은 지금 막 이별을 겪은 이의 것으로 보기는, 솔직히 조금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 얼굴은 마치 뭐랄까.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깊은 체념. 이미 감정이라는 것을 한계치까지 모두 소진해버린 후 지독한 환멸의 밑바닥까지도 전부 다 맛본 이의 얼굴. 딱 그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혹시 둘은 연인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금 전 먼저 떠난 여자의 행동들은 누가 본다 해도 먼저 이별을 고하는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내내 응어리져 있던 마지막 진심을 토해내 듯 쏟아냈지만 끝내 자기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그 허무와 체념. 결국 그것을 홀로 가득 안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 이별의 마지막. 그 여자의 모습은 딱 이러했다. 하긴.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다 판단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동네에서 혼자 길을 잃은 와중에 생전 처음 보는 연인들의 이별의 순간을 목격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그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남의 연애사에 조금의 관심도, 어떠한 흥미도 없지만 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보게 되는 걸까. 저 남자.




“…….”




  남자는 아직 여전히 탑이 열려있는 컨버터블 안에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이미 푹 젖어버린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무거운 한숨을 푹, 길게 내쉬었다. 굉장히 지쳐 보이는 얼굴로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핥고 눈을 깊게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빨간색의 멋진 컨버터블도. 그보다 조금 더 멋진,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도. 내리는 비에 그저 속절없이 젖고 있었다.


  비는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만 했다. 맞은편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하나 사서 쓰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서든지.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지하철역으로 되돌아가든지. 이제는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기약 없이 앉아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내게 마치 STOP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상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혼자 길을 잃은 채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내가 많이 기다리던 전화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현실로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어떤 스위치와도 같았다.




― 형, 어디예요? 왜 안 와요?

“…저기, 있잖아, 상혁아.”

― 네, 형. 말해요. 무슨 일 있어요?

“미안한데, 나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 아…. 그럼 그냥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우산은 있어요?

“아니, 없어.”

― 밖에 있지 말고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지금의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먼저 내린 쪽은 내가 아닌 그 남자였다. 남자는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더니 그대로 도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더 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그 일련의 동작들에는 어떠한 침전된 감정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얼굴 값 꽤나 하는 놈이었네.




― 형, 제 말 듣고 있어요?

“어? 어…어.”

― 근처에 큰 건물 뭐 보여요?

“…명품관?”

― 네. 저 금방 가요.




  남자는 시동을 걸고 미끄러지듯 도로를 빠져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는 나 혼자만이 있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먼저 떠난 그 여자는 끝내 울었을까. 남자는 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 던지면서 어떤 해방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그저 남의 일. 그 뿐이었다.














Great melt 上

이홍빈

차학연














  낯선 곳에서 혼자 길을 잃었을 때 본의 아니게 이별 장면을 목격했었던 그 당사자를, 또 다른 장소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될 확률은?




“…….”

“그만 좀 쳐다보죠? 나도 지금 그쪽 못지않게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중이니까.”




  거봐, 얘 얼굴 값 겁나 한다니까. 연인과 헤어지자마자 커플링을 도로 바닥에 던져버리던 남자의 모습은 마치 어제 일처럼 내 기억에 생생히도 남아있었다. 일말의 미련도 뭣도,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보이던. 물론 내가 그 속사정까지는 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남자를 처음 본 모습이 하필 그러해서 다시 만난 지금도 그는 내게 썩 호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그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이중계약 사기. 남자가 지금 이렇게 내 집에 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낯선 그 남자를 지금 이 시간, 여기 이곳, 내 집의 거실에서 다시 마주한 이유가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라니. 괜한 헛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그럼 뭐, 어떤 이유를 상상한 걸까. 나 아무래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은데.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관계의 형태는 가지각색이고 그 색도, 향취도 같은 것 하나 없이 모두 다르다. 인연이 될 수도, 악연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남자와의 이 관계도 어쩌면 인연이라면 인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고작 얼굴 두 번 본 걸 가지고 ‘관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좀 거창한 것 같지만 말이다. 비록 남자와의 첫 만남은 오직 나밖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저 흐린 기억 속에 조용히 묻혀 버릴 그런 우연으로만 끝나지 않은 채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러니 앞으로 어떠한 관계로 발전하기에 충분한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저 남자는 나를 오늘 처음 본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본 남자의 첫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첫인상 또한 제법 범상치 않았었다. 솔직히 연인과 헤어지자마자 커플링을 바닥에 던져버리는 게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잖아.




“세입자로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이렇게 와서 당황스러울 거 알아요. 근데 나도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기라는 걸 당한 상태라 정신이 좀 없네요. 그 점은 그쪽이 이해 좀 해줬으면 해요.”

“…예, 뭐. 제가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게 있을까 싶지만. 뭐, 이해할게요.”

“왜 달라지는 게 없어요? 이제부터 그쪽이 내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은인이요? 제가 그쪽을 구한 적이 없는데 무슨 은인이요?”

“지금 구해줄 거니까요. 저 이 집 계약하느라 모아둔 돈 다 털어서 당장은 보증금이 없어요. 이대로 나가면 노숙, 아니면 찜질방. 그래서 지금 당장은 못 나가요.”




  아무래도 저 남자는 내가 당연히 허락을 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결국 이 집에서 같이 살게 해달라는 말을 하는 거면서 뭐가 저렇게 당당해. 어디 뭐 나한테 방이라도 맡겨놨어? 내가 거절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만약 내가 거절하면요?”

“보증금이 해결되는 대로 바로 나갈게요. 그러니까 그동안만 불편해도 조금 참아줘요.”

“…….”

“설마 진짜 이대로 내쫓을 건 아니죠?”

“…….”



  그 질문에 당연히 예스라고 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쉽게 안 떨어진다. 사람의 성향을 나타내는 수많은 유형에는 자기 얼굴을 무기라고 생각하는 케이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 그런 진짜 무기. 두 번째는 이 얼굴에 감히 안 넘어갈 이가 누구냐. 다 홀려버리겠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를 다 이룰 것이다. 소위 말하는, 미인계. 이 남자는 당연히 두 번째 유형이다.




“저 진짜 갈 데 없는데.”




  남자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 정점을 찍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갈 데 없다는 사람을 그대로 내쫓을 만큼 나는 독하지를 못했다. 내겐 조금 억울한 말이지만, 워낙 물러터진 천성 때문이었다. 형은 그래가지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요? 한상혁의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끔, 아니 사실 꽤 자주 날리는 팩트 폭력이 좀 괘씸해서 그렇지 녀석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니까.


  룸메이트를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비어있는 방의 상태는 당연히 엉망일 것이다. 청소를 하기에도 지금은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남자의 등장은 여러모로 내게 당황의 연속이었다.




“…남아있는 방이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어서 지저분할 거예요.”

“청소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예, 뭐. 그렇게 하세요.”




  남자는 꽤 무게가 나가 보이는 캐리어를 거실 한 쪽에 얌전히 잘 세워두고 그제야 한시름 놓은 얼굴을 했다. 나와는 제대로 된 일면식조차 없는 사이인 주제에 제법 뻔뻔하게 나오는 게 괘씸했는데. 막상 그 한 꺼풀 벗겨진 얼굴을 보고나니 어쩐지 꽁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줏대가 없었나. 사람 마음 참 갈대 같네.


   


“아. 전 이홍빈 이에요. 잠깐이기는 해도 어쨌든 매일 볼 텐데. 통성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요.”

“차학연, 입니다.”

“오늘은 소파에서 잘게요. 그냥 저 없다고 생각하고 쉬세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요.”

“별로 예민하지는 않아요. 너무 소란스럽지만 않으면요.”

“그럼 잠깐 소란스러워질 예정이니까 미리 양해 구할게요. 욕실 좀 써도 되죠?”

“…그런 것까지 저한테 일일이 묻지 않아도 되는데요.”

“그냥요. 어쩐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남자는, 아니 이홍빈씨는 내내 조금은 무겁게 깔려있던 이곳의 분위기를 단숨에 해소시켰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에 지지리 요령 없는 내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홍빈씨는 가지고 온 캐리어를 열어 옷가지와 생필품 몇 개를 챙겨들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왔을까. 뭘 하는 사람일까. …어떤 사람일까. 그제야 그런 궁금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보통 그런 궁금증은 누군가 내 집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늦은 밤, 내 집에 낯선 타인을 들인 걸로 모자라 이제는 그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홍빈씨에게 티는 안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긴장되고 당연히 걱정도 됐다. 나 혹시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든 것은 아닐까. 마인드맵처럼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솔직히 조금 겁도 났다. 말해두겠지만, 지금의 이 결정이 내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홍빈씨는 그런 내게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 비록 그 방법이 실없는 대화를 거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문이 굳게 닫힌 욕실 안에서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제법 시원스럽게 들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 백색소음 같은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그게 편했고 또 익숙했다. 평소의 이 시간이라면 집 안에는 묘한 적막감 같은 것이 공기처럼 배회한다. 주방과 거실을 돌아다니고 이 방과 저 방을 드나드는 사람이 오랫동안 나 하나뿐이어서 어쩌면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큰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 요새에 누군가 소리도 없이 날아들었다. 그 누군가는 오랫동안 혼자였던 내 곁을 기꺼이 내어줄 길조일까. 아니면 내 안식과 평화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나를 해할 흉조일까.


  현재 내가 이홍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름뿐이지만 그와 내가 앞으로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어졌다. 매일 그와 얼굴을 보고, 말을 섞고, 시선을 얽으면서.














  이홍빈이 이곳, 내 집에서 나의 동거인…아니, 룸메이트로 생활한 지 오늘로 딱 2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처음 이곳에 들어오고 며 칠 간은 방 안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잠만 잤고 또 며 칠 간은 외박을 했다.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몇 시에 나가고 또 몇 시에 들어오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학교 때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던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홍빈은 나더러 자기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쉬라더니, 진짜로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한 집에서 같이 살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 것 같은 그런, 조금은 이상한 관계. 지금 이홍빈과 내가 딱 그랬다. 이름 이홍빈. 나이 스물다섯. 아직 대학생. 나보다 세 살이 어린, 아주 잘생긴 남자.


  이홍빈은 보기와는 참 다르게 의외로 집안일에 능숙했다. 심지어 요리는 나보다 훨씬 나았다. 내가 처음으로 차려준 아침상을 받자마자 그 묘하게 살짝 굳어지던 얼굴이란. 앞으로 요리는 내가 할게요. 그쪽한테는 오히려 그게 더 편하겠네요. 내가 편한지 편하지 않은지의 여부를 왜 당신이 결정하는데.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이홍빈의 말은 충분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날 그가 손수 준비해준 점심을 먹고 나는 앞으로 그의 말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기로 했다. 음 그래. 자고로 요리라는 것은 적성에 맞는 사람이 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홍빈은 굉장히 깔끔한 성격이었다. 사실 그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매번 잘 못해서 애를 먹던 옷 색깔 제대로 분류해서 세탁기 돌리기라든가. 조금은 귀찮아했던 분리수거라든가. 이홍빈은 무리 없이 잘 해냈다. 따져보면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득이 됐으면 득이 됐지 실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이 말을 이홍빈 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다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괜히 얄미운 구석이 있다니까, 걔는.


  오늘 이홍빈은 어쩐 일인지 외출을 하지 않고 내내 방에만 있었다. 그동안 잠 잘 거 다 잤고 놀 것도 다 놀았으니, 이제는 방 안에서 신선놀음 중이신가. 나는 어째서인지 자꾸만 어린애 같은 마음이 삐죽,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이홍빈이 집에 있으면 뭐. 뭐 어떡하려고. 같이 얼굴 맞대고 놀기라도 하게?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이젠 나조차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 같잖은 오지랖 그만 좀 떨지? 뭘 모르나본데 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든 이제 너랑은 아무 상관없어.”




  방 안에 틀어 박혀 팔자 좋게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홍빈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오호라. 이거 잘만 하면 통화 내용 다 들리겠는데. 나는 지루하게 이어가고 있던 핸드폰 게임을 미련 없이 꺼버리고 마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통화를 하는 이홍빈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곧 굉장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있지도 않은 이홍빈의 통화 중인 목소리가 어떻게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이리도 생생하게 들릴 수가 있는지. 진짜 이상하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 하고 영구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집을 계약 할 때 집주인에게 듣기로는 원래 이곳은 넓은 원룸이었는데 필요에 따라 두 명의 세입자를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해서 그 대책으로 방의 한 가운데에 가벽을 세워 투룸으로 리모델링한 거라고 했다. 그래서 방과 방 사이의 방음이 조금 취약하다고 했다. 나는 계약을 체결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쭉 혼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그 방음의 취약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저 방에 들인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게 형이랑 결혼하겠다고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것도 모자라 실컷 이용까지 다 해먹은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더더욱 아니지 않아? 그래도 같이 한 시간이 있으니까 끝까지 믿어보려고 했던 나한테, 너는 끝내 어떻게 했었지? 사람이 제발 양심이라는 걸 좀 가져봐. 하긴. 애초에 그런 게 있기라도 했다면 나한테 그렇게 까지는 못 했을 거야. 그렇지?”




  …남의 연애사 따위 관심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잃은 낯선 장소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연인의 이별 장면. 마지막 진심을 토해내 듯 소리를 지르는 여자.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하던 남자. 그리고 여자가 자리를 떠나자 미련 없이 커플링을 버리던 남자. 나는 알지만 이홍빈은 모르는, 내가 본 이홍빈의 첫 모습. …이홍빈의 형과 결혼을 하고자 이홍빈을 이용. 이용이라. 이로써 나는 장본인도 전혀 모르는 사이 그 일의 전말에 대한 일종의 해명 아닌 해명이라는 것을 모두 들은 셈이었다. 이것 역시 우연일까. 우연 한번 참 기가 막히네.




“다신 연락 하지 마. 이 번호도 차단할거야. 다른 사람한테 핸드폰 빌려서 전화하는 짓도 이제 그만 두고. 내가 모든 연락 수단을 다 없애버리고 머리카락조차 찾을 수 없게 해외로 꼭꼭 숨어버리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그쯤 해둬.”




  말해두겠지만, 난 정말 이홍빈의 저 통화 내용을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게 절대로 아니다. 그냥 이 집의 취약한 방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귀에까지 들린 것뿐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본의 아니게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지극히 타인인 내가 엿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아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안 굴고 무려 알아서 꺼져주기까지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젠데? 아. 설마 내가 구질구질하게 안 굴어서 그게 좀 아쉬운 거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개새끼가 필요한 거라면, 미안한데 번지수 한참 잘못 찾았어.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절대 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얼굴 값 꽤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호구였나. 잘생긴 남자는 반드시 얼굴값을 한다. 흔하디흔한 조금은 실없는 농담처럼 떠돌고는 하던 그 선입견 같은 우스갯소리가, 정말로 선입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홍빈이 이리도 정확히 증명해 주었다. 무려 저 얼굴로 누군가의 호구라니. 세상은 요지경이다, 정말.


  통화를 끝낸 모양인지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는 소리와 푹- 하고 내쉬는 긴 한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 한숨은 마치, 그러니까 뭐랄까. 누군가에게 아주 오랫동안 시달려 왔는데 그걸 어디에다 말도 못하고 그저 혼자 속으로만 삼킬 수밖에 없는 이의, 아주 버겁고 고된 하소연 같았다. …호구라고 했던 거 취소. 지금의 이홍빈에게 그런 상스러운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내가 차마 다 알지 못하는 억울한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 같아 보이니까. 이홍빈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을 제 안의 깊숙이 침전되어 있는 온갖 감정 찌꺼기들을 모두 끄집어내기라도 하 듯, 몇 번이나 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고요하게 흘렀다. 이홍빈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었고 곧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내가 이 방과 저 방 사이에는 좀처럼 프라이버시라는 게 지켜지기가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이홍빈도 머지않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이 집을 나가는 것을 예정보다 더 앞당기려나. 나도 일개 세입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가 여기 주인인데. 저 방까지 소리가 들릴까 눈치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은 내 요새야. 불청객은 저 남자라고. …뭐, 불청객까지는 아닌가. 매일 적막함이 공기처럼 배회하던 이곳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또 있음으로 그나마 사람 사는 집처럼 변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냥,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쯤으로 해두지 뭐.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내가 아닌 다른 이로 인한 소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온 집안에 익숙한 고요함이 다시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었으니 이제는 내 호흡 만큼이나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리 나쁘지도 않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그것도 아니었나. 이홍빈이 나가고 난 후의 이곳은 너무도 고요해서, 어째서인지 아주 조금 외롭기까지 했다. …외롭다, 라. 참으로 낯선 감정이었다. 그동안 내가 혼자 산 시간이 얼마인데. 이홍빈이 내 집에 온 게 오래되면 뭐 얼마나 오래 됐다고. 정말. 뭐 얼마나 됐다고.




“…….”




  지금 뭔가 굉장히, 공허함으로 가득 찬 통조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역시 이런 기분, 싫다. 진짜로.


  어떠한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든 이유 모를 공허함은 잔잔한 호수 같기만 하던 내게 어떤 파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잔뜩 맥이 빠진 채 느린 걸음으로 소파에 와 앉아 테이블에 놓여 진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적막에 휩싸였던 거실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움이 들이찼다. 시시한 말장난과 자학적인 코드의 개그들이 주를 이루는 예능 프로그램을 한 쪽 귀로 들여와 또 다른 한 쪽 귀로 바로 흘려보내 듯 그렇게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그 많은 시간동안 참 익숙하게 맞이했던 내 혼자의 오후가 언제 이렇게나 달라진 걸까.


  마음이 울적하든 말든 어차피 인간이라면 허기는 당연한 수순처럼 찾아온다. 가끔이기는 했지만 같이 저녁을 먹고는 했던 동거인은 현재 부재중이다. 언제 귀가를 한다는 연락 또한 당연히 없다. 그 말은 즉, 오늘은 나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혼밥이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사실 그건 내게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더 없이 익숙하기까지 한 일이다. 나중에 들어온 이홍빈이 엄청 아쉬워할 만큼 나는 오늘 저녁 최고의 만찬을 즐길 것이다.


  마음은 이미 그렇게 먹었으니 이제 그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천근만근 무거워진 내 비루한 몸뚱이는 소파에 계속 이대로 눌어붙어 있기를 원했다. 나를 조금씩 갉아먹는 지금의 이 공허와 허기에서 서둘러 벗어나기를 바라는 이성과,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퍼져있기를 원하는 육체의 팽팽한 신경전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고, 의미 없다.


  마른 한숨을 한번 푸욱, 길게 내쉬었다. 마구잡이로 뒤흔들리는 속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배도 고프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우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몸은 그와 반대로 한없이 나태하게 늘어지기만 했다. 집 안을 유령처럼 떠도는 적막을 견디지 못해 틀어놓은 TV는 이미 자체 음소거가 된지 오래였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푹 잠긴 것처럼 조금은 아득한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잠에 빠져들려 할 때쯤, 갑자기 현관문 밖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해제되는 맑은 기계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나는 급히 물 밖으로 건져 올려 진 물고기라도 된 듯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거의 튀듯이 일으켰다.


  이홍빈이 현관 앞에 서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리고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거실로 쭉 걸어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와?”

“그냥 밖에. 맥주 사왔는데. 형도 마실래?”

“…어. 그래. 그러지 뭐.”




  이홍빈은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맥주 캔과 치즈스틱. 그리고 아이스크림 몇 개. 아이스크림은 녹기 전에 얼른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내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홍빈은 맥주 캔 하나를 따서 건넸다. 물기 어린 표면이 차갑고 조금 미끌거렸다. 우리는 잠시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맥주만 마셨다. 내가 한 캔. 그리고 이홍빈이 두 캔 정도를 비웠을 때 쯤. 그의 듣기 좋은 중저음이 나긋하게 귀를 울려왔다. 그 매력적인 목소리가 지금의 이 고요한 거실과 지독히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거실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방으로 들어가니까 여기 방음 진짜 안 좋더라.”

“…알고 있었네.”

“모르나본데, 형 너 잘 때 잠꼬대 하는 거 내 방까지 다 들려. 아주 그냥 버라이어티 해.”

“거짓말은 하지 말지? 잠꼬대 같은 거 누가 한다고.”

“누가 하긴. 지금 내 옆에 앉은 차학연이 하지. …그러니까 그렇게 내 눈치 볼 거 없다고.”

“…아까부터 자꾸 알 수 없는 얘기만 하네.”




  이홍빈은 남아있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하얀 미간에 아주 잠깐 주름이 그어졌다가 곧 사라졌다. 비어버린 맥주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치즈스틱을 한 개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




“아까 나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 옆방까지 다 들렸을 거 아냐. 그래서 지금 내 눈치 보는 거고.”




  이홍빈은 구렁이 담 넘어가 듯 그렇게 슬쩍 넘기려 했던 내 배려 아닌 배려를 전혀 몰라주고, 기어이 저렇게 직구를 던지고 만다. 이 뭐…. 이래서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부러 빈 맥주 캔을 소리 나게 구겨 테이블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뭘 모르나본데. 난 원래 남의 눈치 같은 거 안 봐.”

“그래. 그런 것 같아 보이네.”

“지금 그거 나 욕하는 거지?”

“설마.”




  나는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별로 괘념치 않고 있으니. 너도 내가 그 통화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내 행동은 대충 그런 의미였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지지리 요령 없는 내가 이렇게 개떡같이 표현해도 그는 찰떡같이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모르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랑 지내는 거. 좀 불편한가?”

“불편하다고 하면. 나갈 의향은 있고?”

“아니. 알다시피 지금 당장은 어려워.”

“근데 왜 물어보는데.”

“그냥. 어쩐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뭔가 지금 그 대답 낯설지가 않은데. 그리고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나한테 그런 거 일일이 안 물어봐도 된다고 했지.”

“지금 그 대답도 별로 낯설지가 않은데.”




  이홍빈은 별 영양가 없이 이어지는 시시콜콜한 대화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은근한 웃음만 간간히 흘렸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넘기면서 그의 현재의 기분 변화를 세밀히 살폈다. 이제 좀 괜찮아 진건가. 사실 내게는 누군가의 컨디션을 주의 깊게 살피고 신경을 쓴다는 게 조금은 낯선 일이었다. 딱히 인간관계에 목을 매는 스타일은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 생각해보니 아예 없지는 않다. 회사에서 칼퇴를 앞둔 시점에 사장의 눈치를 봐야할 때.




“…안 불편해.”

“뭐?”

“너 여기 있는 거 안 불편하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거 참 다행이네.”

“혼밥 안 하고 좋지 뭐. 그러니까 웬만하면 밥은 집에 와서 먹어.”

“그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아 근데, 요리는 엄연히 내가 한다는 거 알고는 있는 거지?”

“아. 그러네.”




  휴먼 다큐멘터리로 갈 듯 하다가도 결국은 다시 코미디로 유턴. 그와의 대화는 늘 이렇게 실없는 얘기로 마무리가 된다. 장르 변경이 영 쉽지가 않네. 이홍빈은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묘하게 굳어있다고 생각했던 얼굴을 그제야 조금 풀고 소파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 기분이 나아져서 다행이다. 내가 누군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솔직히 아직은 조금 어색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어색한 것과 나쁜 것을 구분 못하는 바보는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오글거리고 어색하다고만 여겼던 일들이 이홍빈으로 인해 하나씩 점점 괜찮아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꽤 괜찮았다. 그러니까 그건 뭐랄까. …내가 조금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














  한 해를 넘길수록 봄이 머무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여름은 더 빨리 오는 추세라고 한다. 아직 6월이건만 더위라는 반갑지 않은 놈은 벌써부터 슬슬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집 안은 찜질방의 불가마에 들어온 것 마냥 온통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밤새 침대 옆에 틀어놓은 오래된 선풍기는 탈탈 소리를 내면서도 열심히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직딩은 휴강도 종강도 방학도 없다. 그래서 당연히 하루의 시작을 고작 이런 날씨 따위에 구애 받지도 않는다. 대신 출근과 퇴근과 야근이 있지. 딱히 일개 직딩인 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출근시간이 빠듯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늘 피로곰을 등에 업고 다니는 비루한 내 몸뚱이는 아까부터 계속 10분만 더―,를 외치고 있었다. 나도 잘 자고 잘 일어나고 싶다, 진짜. 아무래도 재택근무를 해야 할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가벽 너머의 옆방에서는 이미 기상을 완료한 이홍빈이 작게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는 아침부터 참 부지런도 하다. 이홍빈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나도 그에 맞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네?”

“…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냥. 좀 더워서. 욕실은 좀 있다가 들어가. 내가 아까 샤워하고 나와서 아직 좀 더울 거야.”




  이홍빈은 아직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아까의 그 부스럭 거리던 소리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소리였나.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은 방음이 어떻게 된 거야. 정작 이홍빈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으나 나 혼자 괜히 민망해졌다. 오랫동안 혼자서만 생활해서 일까.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내 집에서 샤워를 하고 벗은 몸 그대로 방으로 건너와 옷을 갈아입고 또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나는, 샤워를 하고나서 옷을 입지 않고는 욕실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음란마귀가 낀 게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라고.




“뭐해? 출근 준비 안 해?”

“…아니, 해. 해야지.”

“내 얼굴에 모기라도 붙었어? 아까부터 왜 그렇게 계속 쳐다봐?”

“누가. 누가 누구를 쳐다봐, 누가.”

“아니면 말고.”




  이홍빈은 젖은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거실로 나갔다. 봐. 재는 나를 1도 신경을 안 쓴다니까. 사실 이제 와서 이홍빈이 자기 방의 얇은 가벽 너머에 사는 나라는 존재에 신경을 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나는 같은 집에 살고 또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여태 서로가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나는 왜. 사람 마음 참 어렵다. 딱히 관계에 목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을 뭐라 정의할 길이 없어 더더욱 어렵다. 정말, 익숙하지 않아 이런 건.


  속옷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까 샤워를 해서 안이 아직 더우니까 조금 있다가 들어가라더니. 욕실은 이미 환기까지 다 마친 아주 클린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어젯밤 수건을 세탁기에 돌리고 난 후 마지막까지 정리를 해놓지 않은 채 그냥 잠들어 버려서 지금 욕실 수납장에는 당장 쓸 수 있는 수건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까지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홍빈은 사실 우렁이각시 뭐 그런 게 아닐까. 아니 우렁이 서방인가. 내가 혼자 오랫동안 자취를 했음에도 여전히 집안일의 어떤 부분에서는 한없이 서투른 걸 보고 쟤도 참 지지리 궁상이라고 생각해서 누군가 보내준 뭐 그런.




“계속 그렇게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서 있으면 지각할걸? 빨리 물 틀고 세수부터 해.”




  욕실문 밖에서 이홍빈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만히 서서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집에 CC TV가 있었나. 아니라는 걸 집주인인 내가 더 잘 알면서도 괜히 욕실 안을 크게 한번 빙 둘러보았다. 이홍빈의 말대로 계속 이렇게 서 있다가는 지각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출근 할 때의 그 지옥철의 시간도 이제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까. 네모진 고무 통 안의 수두룩 빽빽한 콩나물시루가 되는 건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지만 말이다.




“머리 말려줄까? 나 말린 김에 형 너도 해줄게.”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자 헤어드라이기를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아있는 이홍빈이 보였다. …형이라고 할 거면 끝까지 형이라고 부르고. 아님 반말을 할 거면 그냥 쭉 반말만 했으면 좋겠는데. 함께 지낸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지켜본 이홍빈은 내게 ‘형’과 ‘너’를 동시에 같이 불렀다. 형 너 말이야. 형 너는. 형 네가. 나는 너한테 형 인거냐, 그냥 너 인거냐.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크게 신경 쓴 적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리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어떤 하나를 깨닫기 시작하면 평소에는 그냥 가볍게 지나치고는 했던 사소한 부분들 까지도 예고 없이 고개를 든다. 과연 이게 이토록 신경을 쓸 만한 부분인건가. 하지만 문제는 이홍빈의 그 호칭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자꾸 내 가슴의 어떤 부분이 간질간질 하고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사람 마음 참 어렵다. 근데 이홍빈으로 인해 어떤 기척도 없이 불쑥 고개를 드는 이 낯선 마음은, 더 어렵다.




“뭐해? 이리 와서 앉아.”

“…어?”

“얼른.”




  이홍빈과 지내면서 깨달은 것 또 한 가지. 보통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도 그가 하면 멜로가 된다. 그게 다 저 얼굴 때문인 것이다. 얼굴이 무기인 사람. 미인계. 물론 이홍빈은 내게 그걸 직접적으로 이용한 적은 없다. 다만 그가 가끔 양 볼에 깊게 파이는 그 매력적인 보조개를 내보이며 아주 달콤하게 미소 지을 때가 있는데. 분명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걸 보면 어째서인지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그리고 결국은 그래 됐다 됐어, 하고 체념해버리는 것이다. 그게 미인계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미인계냐! 이래서 자기 잘난 거 아는 닝겐들이랑은 가까이 하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소파에 앉은 이홍빈의 앞으로 가 등을 보이고 앉았다. 이홍빈은 내가 제 다리 앞의 바닥에 앉자마자 바로 헤어드라이기를 켰다. 그리고 내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털면서 말려주기 시작했다. 그 조심스럽고도 어쩐지 편안해지는 손길에 온 몸에 서서히 나른한 기운이 퍼졌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내 방 안에서는 여전히 낡은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아직 고개를 내밀지 않은 여름날의 이른 아침 시간. 천천히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그리고 내 머리를 말려주는 잘생긴 이홍빈. 늘 혼자이기만 했었던 내 아늑한 요새에서의 몇 없을, 아주 완벽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형, 자?”

“응? 으응….”

“되게 피곤한가보다. 오늘 형 너 대신 내가 출근할까?”




  묘하게 간지럽고 뭔가 조금은 다정한 것 같기도 한, 그 조심스런 손길이 참 좋아서. 나는 거실에 길게 드리워진 햇볕 아래에서 나른하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 마냥 잠시 눈을 감고 졸았다. 이홍빈의 낮은 웃음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조금 더디게 흘렀다.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헤어드라이기의 소리가 이내 멈추었다. 이홍빈은 전원이 꺼진 헤어드라이기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이미 물기가 다 마른 내 머리카락을 몇 번 더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늘 이홍빈은 조금 이상했다. 왜 일까. 왜 그는 아침부터 내게 이토록 다정한 걸까. 아니면 그에게 애정의 싹이 트이기를 바라는 내 은연중의 바람이 그만 착각을 하는 걸까. 지금 이 다정함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 생각만은 분명했다. 깨고 싶지 않다. 이 시간을.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다 말랐다. …차학연. 계속 잘 거야?”

“…어? 어. 아니. 고마워.”




  나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째서일까. 이홍빈의 입에서 내 이름이 불려 진 그 찰나의 순간, 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았던 내 머리가 두피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른하게 쏟아지던 졸음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이홍빈과 내 사이에 한없이 묘하고도 간지러운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이 공기처럼 배회했다. 나는 출근 준비를 조금 더 서둘렀다. 이홍빈과 계속 이렇게 같이 있다가는 내가 좀 이상해질 것 같아서. 오늘따라 이상한 사람은 이홍빈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 쪽인 것 같다.




“다녀와. 차 조심하고. 걸으면서 핸드폰 보지 말고 길조심해. 특히 사람 조심.”




  …역시 정정한다. 오늘따라 이상한 사람은 역시 이홍빈이 확실하다. 그는 평소에 아침 인사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저렇게 길게, 또 살갑게 말을 하지도 않는다. 아니 사실, 그는 원래 이렇게 이른 아침에 일어나지도 않고 내 머리를 말려주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참 이상한 아침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홍빈. 이 우렁이 서방아. 너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인거냐.


사람 마음 참 어렵다. 그리고 이홍빈의 마음은, 더더욱 어렵다.














“…….”




…당황스럽다. 설마 이런 전개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아. 미치게 하네, 진짜.”

“차대리,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전혀 없었는데요.”

“없었는데? 왜 과거형이야?”

“방금 생겼거든요.”




  원래 여름날의 날씨는 철없는 아이처럼 그렇게나 변덕스럽다고 했던가. 아침부터 참 따갑게도 내리쬐던 햇볕은 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춘건지. 오후로 접어들자 갑자기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이겠거니 가볍게 여겼던 비는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이 비가 더위를 식혀 줄 반가운 손님이라 여겼던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이었다. 소나기든 폭우든 아무렴 상관없다만, 문제는 내가 지금 우산이 없다는 시점에서 발생했다. 미치게 하네, 진짜.


‘오후에 비 온대. 우산 챙겨 가.’

‘갑자기 뭔 비야. 아침부터 태양이 작렬이구만.’


  오늘 아침, 내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이홍빈과 나눈 대화였다. …그냥 조용히 이홍빈 말 들을걸. 6시가 되기 약 10분 전. 좌우 앞 뒤. 칸칸이 세워진 파티션 너머로 분주하게, 하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다들 정각이 되는 즉시 바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산이 있거나 차가 있거나, 혹은 어떤 누군가의 픽업이 있거나. 근데 난 셋 다 없네. 인생을 헛살았어, 아주. 노크를 하듯 창문에 크게 부딪히는 굵은 빗줄기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못해도 족히 5분은 걸어야 한다. 가깝지만 오늘따라 참 멀게만 느껴지는 그 거리를 저 비를 다 맞고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홍빈은 기말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휴학을 했다. 그리고 요즘은 알바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려 졸업반인데 이제 와서 무슨 휴학인가 싶었지만 다 생각이 있겠거니 그렇게 여겼다. 어떤 일을 하는 건지 구체적인 설명은 해주지 않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말을 제외한 5일 동안 이른 오전에 나갔다가 늦은 밤에 귀가한다.


  이홍빈과 나는 매일 잠들기 전 두 방의 경계를 나눈 얇은 가벽 너머로 대화를 나눈다. 내게 책임 전가를 하고 일을 떠넘긴 부장의 험담. 그의 친구가 필름이 끊겨 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동안 질질 짜댔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 시시콜콜한 잡담부터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까지. 대화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이홍빈을 볼 때마다 계속 궁금했지만 혹여 오지랖이라고 생각할까봐 고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그 질문을 과감히 던졌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게 어떤 용기 같은 거였다.


‘알바 그거. 보증금 마련하려고 하는 거야?’

‘겸사겸사? 사실 나 이번에 영국 가려고 휴학한 거라.’

‘영국? 해외여행?’

‘어. 오래 전부터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딱 좋을 것 같아서.’

‘얼마나 있는 건데?’

‘확실히 정해놓은 건 없어. 거기가 좋으면 그냥 쭉 눌러 앉을 수도 있고.’

‘…별로면 오는 거고?’

‘글쎄. 그래도 여기보다는 좋지 않을까?’

‘그래. 그렇겠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이홍빈은 자는 건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새벽. 어째서인지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을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출저를 알 수 없는 심란함에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람 마음 참 알기 쉽다가도 또 이렇게나 어렵다.


  아무튼. 내가 이홍빈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느냐 하면. 그는 지금쯤이면 정신없이 일에 치이고 있을 거라 이 쉴 세 없이 퍼붓는 비를 가려줄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사실 내게 와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기꺼이 와 줄 수 있는 사람이냐, 그것 또한 장담할 수는 없다. 차학연 너는 대체 뭘 기대한 건데.




“…….”




  …뭐. 사람이 이 정도 비 좀 맞는다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러고 있을 시간에 이미 정류장까지 갔겠네. 이홍빈 말 제대로 안들은 내 죄인데 누구를 탓하겠냐.


  회사의 로비를 지나 거대한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가방을 머리에 얹고 그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지금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고픈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정류장의 차가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비를 피하면서 그저 빨리 연락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는데. 이깟 비 좀 맞는다고 뭐. 아무도 듣지 않는 자기위로를 애써 몇 번을 곱씹으며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홍빈은 우산 잘 챙겼나 몰라. 오늘은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나.





  정류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내가 앉을 자리 하나쯤은 있었고 다행히 빗줄기는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버스 정류장. 만약 누군가 듣는다면 조금은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이홍빈은 모르지만 나는 아는 그 첫 만남의 장소 또한 버스 정류장이었으니 말이다. 약 10분 뒤 도착한 버스는 나를 싣고 그대로 비 오는 거리를 달려 또 다른 정류장 앞에 세웠다가 다시 출발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름 모를 어느 정류장 앞에 정차 했을 때.




“…어?”




  나는 맨 뒤쪽의 창가 자리에 앉아 창문에 톡톡 부딪히는 빗줄기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의외의 인물과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보다 조금 더 앞쪽의 도로변에 세워진 빨간색 컨버터블. 분명 언젠가 한번 본적이 있었다. 차종은 잘 몰랐지만 바디가 그리 흔한 디자인은 아니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의 도로변.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는데도 이상하게 탑이 열려있던 빨간색 컨버터블. 바로 이홍빈과 여자가 타고 있던 그 차와 똑같았다. 물론 같은 차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빨간 컨버터블이 그때의 그 차가 맞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이유는,




“…….”




  조수석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거기에서 다름 아닌, 이홍빈이 내렸기 때문이다. 이홍빈은 짜증이 가득 배인 손길로 문을 세게 닫고 아직 사람들을 차례로 태우고 있는 버스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큰 보폭의 걸음으로 따라오는, 운전석에서 내린 또 한 명의 남자. 남자는 이홍빈 만큼이나 키가 컸고 피지컬이 남달랐다. 굵고 짙은 남자다운 얼굴선에 큰 눈과 무척이나 높은 코. 거기에 두툼한 입술까지. 단 한번을 보더라도 쉽게 잊혀 지기는 어려울, 그런 꽤나 강렬한 인상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저 남자가 이홍빈의 친형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말에 대해 어떤 근거가 있느냐 묻는다면, 물론 근거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형제일거라고. 이홍빈과 문제의 그 여자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형이라는 존재가 바로 저 남자일거라고. 사실 둘은 혈연관계라고 하기에는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말이다. 가끔은 물증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보다 심증의 무게를 더하는 감이 더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도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이 바로 그 경우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이홍빈에게 우산을 주려는 모양이다. 본인 역시 비를 전혀 피하지 못해서 머리와 옷이 다 젖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이홍빈은 남자의 손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건네 오는 우산을 받지 않았고 닿고자 하는 마음을 거절했다. 이제 버스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거의 다 태웠고 곧 출발 할 것이다. 이홍빈은 버스를 타려는 것인지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홍빈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도록 우산이 들려진 이홍빈의 손을 꽉 붙잡았다. 결국 이홍빈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우산을 받아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 출발했다. 남자는 아직 차로 돌아가지 않고 서서히 움직이는 버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얼굴이, 옷이, 신발이 비에 빠르게 젖어갔다. 그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멀어졌다. 버스는 속력을 내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멀어지고 멀어져 결국 점이 되었을 때 쯤. 나는 그제야 이홍빈이 내 자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고작 뒷모습뿐이어서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감히 쉽게 상상할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홍빈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직 내리고 있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서만 섬이었다. 버스가 잠시 멈추면 옆자리에 가서 앉을까. 하지만 이내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그는 지금 아무래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사색에 젖을 수 있는, 그런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였으니까.


  어쨌거나 하나의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홍빈은 끝내 그 우산을 쓰지 않았다. 버스에서 먼저 내리는 그의 손에 우산은 들려있지 않았다. 그는 형의 붙들어오는 손을 끝까지 뿌리치지는 못했지만 결국 우산과 함께 건네 온 마음은 거절한 셈이었다. 어쩐지 그것이 묘하게 씁쓸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 이홍빈이 홀로 버려둔 우산을 고이 잘 챙겼다. 그에게 이걸 다시 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차마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냥.


  이홍빈은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알바를 하러 갔을 텐데 어떻게 형과 같이 있었을까. 왜 그렇게 짜증을 냈을까. 막상 형을 밀어내고 버스에 올랐을 때 그는 왜 그렇게 외딴섬에 홀로 남겨진 이 같은 모습을 했을까. 분명 거절은 네가 했는데. 왜 내 눈에는 오히려 네가 선 밖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보일까.


  이홍빈은 도로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 걸었다. 이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홍빈과 내가 함께 사는, 우리의 집말이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홍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쟤 어깨가 원래 저렇게 야위었었나. 원래 저렇게 터덜터덜 걸었었나.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나란히 걸어본 적도,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함께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추억이 없구나. 공유한 기억이 참 많이 없다, 너랑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순간 가슴이 선뜩해졌다.


  이홍빈은 곧 내 집을 나갈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방 알아차린다고. 나도 물론 처음에는 많이 허전할 것이다. 잠을 설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래 어쩌면 조금 외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그것도 무뎌질 것이다. 하루에 하루를 더해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는 처음부터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다 잊고 살아갈 것이다.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만들어진 그와의 인연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잠들 것이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새드엔딩도, 그렇다고 딱히 배드엔딩도 아니었다. 동화 속에서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도 결국은 어떤 일도 다시 일어나지 않고 그저 그 상태 그대로 무뎌지고 익숙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다행이었다. 조금은 무겁고 더딘 발걸음으로 혼자 집까지 걸어야 하는 이홍빈이 더 이상 비를 맞는 건 나도 좀 별로니까. 그는 어느새 꽤 멀리 가 있었다. 나는 다시 서둘러 그를 따라 걸었다. 이미 저만큼이나 멀어져버린 이홍빈과의 거리를 다시 좁히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부지런히 걸어야만 한다.


  우리의 결말은 결국 새드엔딩일지. 배드엔딩일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 해피엔딩일지.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홍빈과 나는 아직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닌 관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인연도. 악연도. 길조도. 흉조도.


타인도.

…연인도.


우린 아직 그 페이지를 제대로 열어보지도 않았잖아.